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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테크 & 경제

[스크랩]부자들의 생각을 읽는다.

by 처음처럼v 2010. 5.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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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최신 과학으로 풀어 본 부자방정식

부자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 똑똑한 소수의 편에 서라! / 패턴화의 이중성을 이해하라!

‘부자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사실 이 질문에 대해 똑 부러지는 답을 내놓기는 어렵다. 막연할 뿐만 아니라, 부자에 대한 정의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우회로를 선택해 보기로 했다. 그 우회로의 입구는 이런 의문으로 시작된다. ‘부자가 소수의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 소수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보상을 받았다는 얘기 아닌가. 그렇다면 보상의 크기가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큰 보상이 발생하는 지점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상식적인 얘기지만, 나눠 먹을 것이 많은 경우에는 보상의 크기가 적어진다. 고스톱의 예를 들어 보자. 고스톱의 성패는 3점을 자주 내는 것보다, 혼자 먹을 수 있는 상황이 왔을 때 최대한 많이 따는 데 달려 있다. 즉, 보상이 커지는 시점에 최대한 그 혜택을 누리는 것이 포인트다. 그런데 보상이 커지는 시점을 얻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가 맞아떨어져야 한다. 패도 어느 정도 잘 들어와야 하고, 상대방이 설사를 해서 무임승차를 할 수 있는 기회도 만들어져야 한다. 그리고 고를 할지 스톱을 할지에 대한 적절한 상황 판단도 필수인데, 앞의 요소들이 운의 영역이라면, 상황 판단은 본인의 영역이다. 이런 식의 보상 메커니즘이 단순히 고스톱 판에서 작동하는 원리일까. 그렇지 않다.

 

정리하면 보상이 커지기 위해선 첫째, 경쟁자가 적어야 한다. 둘째, 경쟁자가 들어오기 전까지 빨리 차지해서 진입 장벽을 높여 놓아야 한다. 셋째, 그것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 참고로 자연계의 모습이나 뛰어난 사업가 혹은 투자자들의 모습을 분석해 보면, 보상의 크기를 키우는 길은 의외로 명확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즉 크기를 키우기 위해서는 보상이 많은 상황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설사 독식할 수 없다 하더라도 경쟁자가 적어야 하는데, 헤지펀드계의 대부 조지 소로스와 함께 퀀텀펀드를 창업한 짐 로저스는 “남들 하는 대로 따라 하지 말고 자신의 머리를 써야 한다”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남들과 다른 길로 가는 데는 수많은 압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보상의 크기를 키우기 위해서는 다수의 압력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부자가 된 똑똑한 소수들은 대부분 다수의 압력을 피해 무지한 대중의 길을 가지 않는 방식으로 의사 결정을 한 경우가 많았다. 참고로 샘 월튼은 후배 기업가들을 위해 10가지 조언을 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흐름을 거슬러 오를 것’을 주문하고 있다. 어디 월튼뿐인가. 화장품 마케팅의 역사를 다시 쓴 에스티 로더는 영업에서 기존의 통념을 깨는 방식으로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다수를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독자적 사고의 힘’을 스스로 가져야 한다는 의미다.

 

한편 사람들은 왕왕 전혀 연관성이 없는 것에 일정한 패턴을 부여하는 경향이 있는데, 인간의 패턴 추구 행위를 잘 드러내는 예를 우리는 좌뇌와 우뇌가 분리된 뇌분할 환자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뇌분할 환자들은 자신이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면서도 어떤 연관관계나 이유를 들어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곤 한다. 이런 패턴 추구 행위는 집단 본능과 더불어 인간이 아직도 원시 야생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주요한 증거 중 하나다. 왜냐하면 인간의 뇌에는 원시시대에 사냥을 하고 채집을 하면서 성공했던 행동이나 방식이 깊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패턴 추구 행위에는 커다란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확률론적 상황’에서 인간이 저지르는 비합리적인 행동들이다. 그 전형적인 예가 ‘도박사의 오류’다. 동전 던지기에서 매번 앞면과 뒷면이 나올 확률은 50:50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계속해서 동전의 앞면이 나오면, 이제 뒷면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로 50번 연속 앞면이 나온 상황에서 앞면과 뒷면에 돈을 걸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뒷면에 배팅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 앞면과 뒷면이 나올 확률은 이번에도 똑같이 50:50일 뿐이다. 이처럼 무작위적인 확률 사건에서도 사람들은 패턴화를 추구하고 의사결정을 하며, 또 그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다.

 

아무튼 우리가 생활을 하고 비즈니스를 하고 사람들을 사귀고 만나는 과정에서 패턴화 능력은 매우 중요한 요소다. 아니 원시시대부터 이런 능력이 뛰어난 사람일수록 생존 가능성이 높았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문제는 현대에는 도박 기계적 상황이 우리 삶의 일부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주식시장’이다. 핑커 교수는 “효율적인 주식시장도 인간의 패턴 감지를 무력화하도록 설계된 발명품”이라고 지적하고, 마이클 모바신은 주식시장에서 패턴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함정이 있다고 지적한다. 첫째는 패턴화에 따른 원인과 결과의 인과관계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예로 실제 어떤 사건은 시장의 움직임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지만, 다른 사건은 전혀 그렇지 못한데도 사람들은 애써 연관관계를 찾곤 한다. 두 번째 함정은 ‘앵커링(anchoring)’이다. 배가 정착할 때처럼 기댈 곳을 찾는 것인데, 사람들은 어떤 사건이나 설명에 대해 그 증거의 일부분이나 처음 들은 것에 안주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현명한 투자자들은 무작위적인 주식시장에서 패턴을 찾지 않는다. 때문에 가격 변동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엄격한 규율에 따른 투자를 한다. 그 기준이 되는 것이 가치다. 아무튼 우리는 패턴화의 이중적 의미 -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뛰어난 패턴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단, 도박 기계적 상황이라면 패턴화 능력은 위험하다 - 를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학습과 호기심, 성공의 두 날개 / 자제력이 보상의 크기를 바꾼다

기자로 일하던 시절, 가난의 시련을 딛고 부자가 된 한 기업가를 만난 적이 있다. 고등학교 중퇴의 학력으로 수천억 원대의 재산을 모은 그를 만나서 물었다. “선생님이 부자가 된 비결은 무엇입니까?” 그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공부하는 자세입니다.” 나는 또 물었다. “도대체 어떤 공부를 해야 합니까?” 그의 대답은 명쾌했다. “먼저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공부를 하고, 그 다음에 취미나 관심 있는 분야에 대한 공부를 해야 합니다. 만일 박찬호가 야구 외에 골프가 취미라며 골프만 한다면 그의 몸값은 아마 형편없어질 겁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무릎을 탁 쳤다. 다른 사람들의 경험적 증언도 이와 다르지 않다. GE 그룹을 이끌고 있는 제프리 이멜트 회장도 끊임없는 학습을 강조한다.

 

심리학자 앤더스 에릭슨은 오랫동안 천재와 영재, 그리고 운동ㆍ예술ㆍ연예 등 다양한 분야에서 우수한 성과를 거둔 사람들에 대해 연구했는데, 그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자신을 한계 상황에 몰아넣고, 이로 인한 성과에 대해 자제를 키우려는 의지다.” 그 실례로, 유명한 서베를린 음악 아카데미를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를 제시했는데, 이 결과에 따르면 우수한 학생들은 일주일에 평균 24시간을 연습에 매달리지만, 평범한 학생들은 일주일에 평균 9시간만 연습에 투자했다고 한다. 즉, 반복적인 훈련과 연습이 우수한 성과를 낸 사람들의 공통점이라는 것이다. 한편 뇌에 관한 여러 연구와 실험 결과도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상식과 결코 다르지 않다. 즉 돈을 벌든 능력을 계발하든, 좋은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반복적인 훈련과 연습을 해야 하고, 그 과정은 인간의 뇌가 작동하는 방식과 같은 방향이라는 점이다. 참고로 현대 뇌과학의 주요 개념인 ‘신경 가소성’에 비추어 보면 의미가 더욱 또렷해지는데, 신경 가소성이란 외부 환경이나 자극에 대해 뇌의 뉴런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성향을 말한다. 보충 설명하면, 과거에는 뉴런이 생후 첫 몇 년 뒤에 집중적으로 발달한 후 더 이상 변하지 않으며 또한 신경세포가 죽으면 재생이 안 된다는 사고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현대 과학은 이런 사고가 잘못됐음을 증명했다. 오히려 뇌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재조직하는 변화무쌍한 존재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예를 들어 피아니스트의 경우, 일반인보다 운동과 관련된 뉴런들이 더욱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손가락의 움직임이 다른 사람들보다 빠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네트워크는 오랜 훈련과 주의 집중으로 생겨난 것들이다.

 

한편 비즈니스 서적을 읽으면 “장기적 관점에서 의사결정을 하라”는 말이 종종 등장한다. 그런데 우리는 왜 교과서적인 정답 ‘장기 투자’ 또는 ‘장기적 관점’과 달리 행동하는 것일까? 참고로 장기적 관점이 드러난 형식이라면, 숨어 있는 인간의 태도는 바로 ‘자제력’이나 ‘인내심’이다. 그리고 동기 부여와 자제력과 문제 해결 능력을 다루는 부위는 뇌의 ‘전두엽’이라는 부분인데, 진화 발달 단계에서 볼 때, 포유류 중 전두엽이 가장 발달한 동물이 바로 인간이라는 종(種)이라고 한다. 실제 미국이나 한국에서 실시한 실험에 따르면, 부자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뇌를 촬영한 결과, 부자들은 문제를 해결할 때 전두엽을 더욱 많이 활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무튼 자제력은 부자들의 삶의 태도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인성인데, 놀라운 자제력의 절정을 보여 주는 인물이 바로 워렌 버핏이다. 그는 2005년에 맥주회사 안호이저-부시의 주식을 사들였는데, 그때 그는 “25년 동안 안호이저-부시의 연차 보고서를 빠짐없이 읽어봤고, 드디어 내가 원하는 가격대에 이르렀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부자들의 사고방식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첫째, 바로 인생을 학습과정으로 바라보는 태도다. 둘째, 강력한 동기와 호기심이다. 셋째, 자제력인데, 자제력은 현재 대신 미래를 선택하는 행위다. 넷째, 원시적 감정의 지배를 받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보충 설명하면 우리는 아직도 우리 조상들이 생존에 성공했던 방식을 그대로 활용하려 한다. 예를 들어 툭하면 집단에 휩쓸리고, 남들이 하니까 그대로 따라야 한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투자 의사 결정을 내리는 주식시장 같은 도박 기계적 상황에서는 집단을 따르는 방식으로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즉 패턴화를 추구하는 경향의 이중적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덧붙이면 도박 기계적 상황이 아닌 곳에 패턴화를 추구하는 성향은 매우 의미가 있다. 하지만 현대 사회의 발명품인 주식시장과 같은 상황에서는 패턴화를 추구하는 경향을 스스로 경계해야 한다. 참고로 일류 투자가들은 그래서 패턴화를 추구하기보다는 대부분은 단 한 가지에 집중하는데, 그 방법은 바로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것이다.

 

2장 세계의 부자, 부자의 세계

 

백만장자 마인드를 키워라 - 장 폴 게티

어린 나이에 석유 사업에 매료된 폴 게티는 16세 때 아버지에게 유정 발굴 작업에 참여하게 해 달라고 부탁하는데, 아버지는 “좋고말고. 단 맨 밑바닥 일부터 할 생각이 있다면 말이다”라는 조건을 붙였다. 그래서 폴 게티는 밑바닥 일부터 시작해 아버지에게 인정을 받은 후에, 자신이 직접 유정 발굴에 나섰다. 이때도 아버지는 1만 5000달러 이상은 절대 투자하지 못하게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유정 발굴에 성공한 게티는 24세에 이미 백만장자가 되었다. 이런 게티가 말하는 부자가 되는 비결은 무엇일까? 그는 백만장자가 되기 위해서는 운과 지식과 열심히 일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했다. 나아가 이 세 가지만으로는 부족하고, ‘백만장자 마인드’가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게티가 말하는 백만장자 마인드란 일과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기술과 지적 능력의 총체를 의미한다. 즉 일종의 기업가 정신으로 해석할 수 있다. 참고로 폴 게티에게서 배우는 부의 지혜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무엇이든 맨 처음은 공부다. 주식이든 부동산이든 깊이 공부하지 않으면 절대 투자에서 성공할 수 없다. 둘째, 주식 투자로 성공하는 비법은 좋은 주식을 사서 장기간 보유하는 것이다. 그런데 좋은 주식은 시장이 어려울 때 싸게 살 수 있다. 참고로 폴 게티는 1920년대 말과 1930년대 초 대공황기에 주식을 사서 무려 30년 이상 보유함으로써 커다란 수익을 올렸다. 셋째, 부동산에 투자할 때는 인구와 해당 지역의 비즈니스 전망을 반드시 점검하라. 넷째, 만일 당신이 부자라면 당신의 자식을 부자로 대하지 말라. 왜냐하면 맨 밑바닥의 생활을 알지 못하면, 부하 직원을 관리할 수 없고, 그들의 마음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섯째, 자기 자신의 일에 엄격하라. 여섯째, 기업가 정신을 가져라. 일곱째, 최소한 일주일에 한 번은 가족과 함께 있는 시간을 만들어라.

 

돈, 사랑한다면 투자하라 - 앙드레 코스톨라니

코스톨라니의 원래 꿈은 예술 비평가였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처음 주식을 접하고는 인생의 방향을 돌렸고, 지난 1999년 93세로 영면할 때까지 평생을 투자가로 살았는데, 독일 증시에서는 ‘미스터 주식(Mr. share)’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참고로 코스톨라니가 파리에서 처음으로 증권거래소를 방문했을 때, 한 노신사가 다가와서는 “젊은이, 여기서 자네를 처음 보는데, 자넨 누군가?”라고 물었다. “저는 오늘 처음 증권거래소에 왔습니다. OO회사의 견습생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렇군. 그 회사 사장이 내 친구라네. 젊은이에게 아주 중요한 것을 가르쳐 줘야겠군. 주위를 한번 둘러보게나. 주식보다 바보가 많은지, 바보보다 주식이 많은지 말일세. 여기서는 그것이 가장 중요하거든.” 코스톨라니는 이 말을 평생 마음속에 두었고, 훗날 ‘수요와 공급의 원리’와 ‘증권 심리학’으로 발전시켰는데, 주식에서 바보가 되지 않는 길은, 바보보다 주식이 많을 때 사서 주식보다 바보가 많을 때 파는 것이다.

 

한편 코스톨라니는 주식 시세를 ‘시세 = 돈 + 심리’라는 간단한 공식으로 정식화했는데, 주가가 오르기 위해서는 유동성과 심리라는 두 변수가 시장에 긍정적이라야 한다는 결론이다. 참고로 그가 주가의 움직임과 관련해 중요시한 지표 중 하나는 장기 금리 추이였다. 왜냐하면 심리적 요인은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에, 유동성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장기 금리의 추이를 잘 살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데이트레이딩 같은 단기 투자는 돈을 벌기 어려운 투자 방법이므로, 중장기적인 투자를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하지만 코스톨라니도 처음부터 장기 투자를 했던 것은 아니었다. 보충 설명하면 주식인생 초기 10년 동안은 약세장 투자를 했다. 즉 주가가 하락할 것이라는 쪽에 배팅하는 일종의 선물 투자를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런 약세장 투자를 그만두게 된다. 왜냐하면 이 투자 방법은 상대방의 고통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었다.

 

참고로 코스톨라니는 많은 글을 통해 돈에 관한 자신의 투자 철학을 알리고, 일반인들을 위한 투자 가이드 역할을 해 왔다. 또 돈이라는 화두를 붙들고 부자가 되기 위한 방법에 대해서도 많은 얘기를 했는데, 그는 “백만장자란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사람을 말한다. 노동을 할 필요가 없으며, 사장이나 고객에게 굽실거릴 필요가 없어야 하고, 괴테의 괴츠를 인용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부자란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교양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 백만장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코스톨라니는 세 가지로 - ① 부동산, 유가증권, 상품 등에 투자해서 큰돈을 버는 것 ② 부유한 배우자를 만나는 것 ③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장사나 사업에 크게 성공하는 것 - 정리했는데, 그는 첫 번째 방법을 통해 백만장자가 되었다.

 

 

투기와 투자를 넘나들다 - 존 메이너드 케인스

경제학자들은 과연 돈을 잘 벌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돈에 관한 한 이론과 현실은 다르다. 역사에 나타나는 경제학자들을 보면, 투자나 재테크로 큰 부를 축적한 사람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데, 그 중 이론과 현실의 영역에서 모두 성공을 거둔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존 메이너드 케인스 경이다. 케인스는 투기 거래자였고, 뛰어난 주식 투자자였을 뿐만 아니라, 본인이 직접 투자 회사 경영에 참여하기도 했다. 케인스는 먼저 환 투기를 했다. 영국 런던의 외환 시장을 통해서 인도의 루피, 미국의 달러, 프랑스의 프랑, 이탈리아의 리라, 그리고 네덜란드의 길더 등 여러 나라의 통화에 투자했다. 하지만 그는 두 번의 큰 실패를 하게 된다. 그래도 그는 자신의 투기 거래에 대해 후회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케인스는 통화뿐만 아니라 상품 투기에도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가 큰돈을 번 것은 이런 투기 거래가 아닌, 주식 투자에서였다. 케인스가 주식 투자로 큰돈을 벌어들인 시기는 1929년과 1932년 사이 미국 증시가 대공황으로 폭락했을 때인데, 루스벨트 시대가 도래하자 그가 사 놓은 주식은 시세가 폭발하기 시작했다.

 

케인스 이전의 경제학자 중 백만장자로 살았던 인물은 데이비드 리카도였다. 리카도는 대학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지만, 증권 중개업을 하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14세에 증권업에 뛰어들었고, 특유의 이재 감각으로 이후 큰돈을 벌어들였는데, 그가 큰돈을 번 시기도 케인스와 마찬가지로 경제 위기 때다. 즉 영국 정부가 프랑스 나폴레옹과의 전쟁을 위해 전시 국채를 4억 파운드어치 발행했는데, 리카도는 여기에 투자해 50만 파운드를 벌게 된다. 케인스와 리카도, 이 두 명의 경제학자에게서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하나는 위기에 투자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시세에 연연하지 말고 장기 투자해야 한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공부하라 - 리자청

홍콩에는 “홍콩 사람이 1달러를 쓰면, 그중 5센트는 리자청의 주머니로 들어간다”는 말이 있다. 리자청이 이끌고 있는 허치슨왐포아와 창장 그룹 계열사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이 말에 자연히 수긍하게 된다. 리자청은 “사업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우선 열심히 일해야 하고, 인내력과 강한 의지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더 중요한 것은 지식이 있어야 한다. 특히 자신의 비즈니스 분야에서 최고의 지식을 쌓아야 한다”고 말했는데, 그는 잠자리에 들기 전 30분의 독서를 통해 지식을 쌓아 대그룹을 이루었다고 한다. 리자청에게서 배우는 부의 지혜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공부하고, 공부하고, 또 공부하라. 리자청이 사업을 시작했을 때 그의 수중에는 5만 홍콩달러(약 600만 원)밖에 없었지만, 그는 ‘내가 가진 것은 지혜와 학습과 노력뿐’이라는 각오로 초창기의 어려움을 이겨 냈다. 참고로 첫 대박을 터뜨린 플라스틱 조화 사업도《플라스틱》이라는 영어 잡지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었다. 둘째, ‘최악의 순간에 투자하고 분산 투자하라.’ 일류 투자가든 사업가든, 이들은 대부분 역발상적인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많다. 리자청도 예외는 아니다. 그가 부동산 사업을 시작한 시기는 홍콩 경제가 최악으로 치닫던 시점이었다. 2003년에 인수한 에어캐나다도 이 회사가 최악의 적자를 보일 때 사들였다. 셋째, 가진 게 없다면 부지런함으로 승부하라. 찻집 종업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리자청은 부지런함으로 종자돈을 마련했고, 사람들에게 신뢰를 얻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부지런하면 부족한 점을 보충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와 반대로 말한다. ‘효율성이 더 중요하다’고. 그러나 양(量)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질(質)이 좋아지지 않는다. 부지런함에 바탕을 둔 시간 투자가 먼저고, 그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터득하는 게 바로 효율성, 즉 질인 것이다. 넷째, 빚을 지지 마라. 리자청은 1956년 이후 ‘무부채, 안정 경영’을 해오고 있다. 천천히 걷는 자가 나중에는 이기는 법이다.

 

비관이 최고조에 달할 때 기회는 시작된다 - 존 템플턴

템플턴은 미국 테네시 주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예일대학교 경제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로즈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참고로 1929년 대공황 한파로 대학교 2학년 때 템플턴의 집안도 경제 사정이 좋지 못했는데, 그는 그 시절을 “아버지는 유감스럽게도 나에게 등록금을 한 푼도 줄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맨 처음에는 무척이나 가슴 아프게 들리더군요.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것이야말로 내가 믿을 수 있는 최대의 행운이었습니다. 그 덕분에 최상위 성적을 받기 위해 정말로 열심히 공부했고, 장학금을 두 개나 받아 등록금을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회상한다. 한편 그가 본격적인 투자자로서의 삶을 살기 시작한 것은 1937년 월가에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부터인데, 그 후 1954년 자신의 이름을 건 템플턴 그로스 펀드를 출범시켰고, 이후 탁월한 성과로 월가에서 명성을 얻었다. 그는 1992년 프랭클린 그룹에 자신의 회사들을 매각하고, 이후 투자 업계를 떠나 자선사업에만 전념하고 있다.

 

존 템플턴에게서 배우는 투자와 삶의 지혜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재테크의 출발은 저축이다. 존 템플턴은 ‘50% 규칙’을 지켰다. 50% 규칙이란 자신의 수입 절반은 무조건 저축하는 그의 생활 습관을 의미한다. 둘째, 돈 보고 직장을 선택하지 마라. 직장을 선택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직업을 선택하는 일이다. 템플턴은 대학을 졸업한 후에 다섯 곳으로부터 채용 제의를 받았지만, 그중 급여가 가장 낮은 곳을 선택했다. 직장은 변하지만 일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 비관론이 가득할 때가 바로 투자 적기다. 1979년 미국의 경제 주간지 《비즈니스 위크》는 ‘주식의 죽음’이라는 살벌한 제목의 커버스토리를 실었다. 주식의 시대는 끝났으니 금 같은 실물 자산에 투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때 템플턴은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미국 주식을 사십시오. 미국 주식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싼 편입니다”라고 투자를 권고했다. 이후 미국 증시는 1982년부터 상승세를 보이면서, 미국 역사상 최대의 장기 사이클을 기록했다. 투자에서 올바른 질문은 ‘어느 곳이 최악이냐고 묻는 것’이다. 넷째, 글로벌 관점을 가져라. 템플턴은 당시 미국 내의 다른 투자가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해외 시장에 투자해서 높은 성과를 기록했다. 시야를 넓히면 기회는 많아진다.

 

부자가 되는 커다란 비밀은 상식에 있다 - 혼다 세이로쿠

샐러리맨에게 부자가 되는 길을 몸소 보여 준 인물이 있다. 전 도쿄대학 농과대 교수였던 혼다 세이로쿠다. 1866년 일본에서 태어난 혼다 교수는 열한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농사일과 방앗간 일을 하며 생계를 해결하고 공부를 했고, 독학으로 열아홉 살 때 지금의 도쿄대학 농학부의 전신인 도쿄 산림학교에 입학했다. 그런데 첫 번째 시험에서 낙제하자 그는 자살을 결심하고 투신한다. 하지만 다행히 죽지 않았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죽기 살기로 공부에 매진하는데, 그 결과 2학기 연속 최우수상을 받을 수 있었다. 이 경험을 토대로 ‘노력하는 범재는 노력하지 않는 천재를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인생 신조를 갖게 됐다고 한다.

 

그 뒤 고학하며 필사적으로 공부에 매달린 결과 혼다 교수는 독일 유학 기회를 잡았고, 노력 끝에 임학 박사 학위를 받아 스물다섯의 나이로 도쿄제국대학(현 도쿄대)의 조교수가 되었다. 어엿한 대학 교수가 됐지만 그의 살림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그런데 최고 명문인 도쿄대학 교수가 됐으니 돈을 많이 벌 것이라고 생각한 가족들은 모두 혼다 교수의 집으로 옮겨 왔다. 아무리 물가가 싼 시절이라 해도 그 상태로는 도저히 헤쳐 나갈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가난을 ‘정복’하기로 굳게 마음먹었는데, 스물다섯의 혼다 교수가 첫 번째로 선택한 방법은 바로 ‘혼다식 1/4저축법’이다. 월급을 비롯해 매월 정해진 수입에서 무조건 1/4을 따로 떼어 내 저축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책이나 글을 써서 생기는 저작 수입이나 상여금 등도 전부 저축했다. 이렇게 저축을 통해서 종자돈을 모은 그는 이 돈을 바탕으로 투자에 나섰다. 독일 유학 시 스승이었던 독일 뮌헨대학의 브렌타노 교수의 가르침에 따라 혼다 교수는 일본 철도 주식에 투자했다.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30주가 300주로 늘어났고, 매년 10%의 배당도 받아 상당한 자금을 모을 수 있었다. 그 뒤 주식으로 번 돈을 자신이 잘 아는 분야인 산림에 투자했는데, 산림 투자는 말 그대로 대박이었다.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일본 경기는 호시절을 맞이했고, 경기 호황으로 목재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자 혼다 교수는 나무를 팔아 돈을 벌었다.

 

혼다 교수는 저축과 투자만 한 것은 아니었다. 쉴 새 없이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그는 “근로자가 돈을 모으려면 단순히 소비를 절약하는 소극적인 자세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본업에 지장이 없는 한 자기 계발에 도움이 되는 일을 선택해서 본업 이외에 아르바이트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혼다 교수가 단순히 돈만 벌었다면 후세 사람들은 그를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가르침이 빛나는 것은 경험에서 나오는 세상사에 대한 통찰력과 기부활동 때문이다. 혼다 교수는 정년퇴직을 하면서 결국 필요한 최소한의 재산만을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학교, 교육, 공익 관련 단체에 기부했다.

 

사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각종 교육 단체와 학교에 기부를 해 왔는데, 기부 활동에 대한 혼다 교수의 사고방식은 ‘1/4 봉사’라는 표현에 잘 담겨 있다. 보충 설명하면, 혼다식 1/4저축법과 마찬가지로, 그는 기부도 계획을 세워서 철저히 지켜 나갔는데, 예로 쉰 살 이후 그는 연 수입을 4등분해서 1/4은 생활비로 쓰고, 1/4은 저축하고, 1/4은 사교 활동 및 수양에, 나머지 1/4은 사회봉사에 썼다. 재미있는 점은 예순 살에 최소한의 돈만 남기고 사회에 기부한 다음 다시 부자가 됐다는 사실이다. 세상 사람들 중에는 부자가 되는 커다란 비밀이 따로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혼다 교수의 삶을 보면 그 커다란 비밀이 극히 상식에 다름 아님을 알 수 있다. 절약하고 힘써 일하고, 그렇게 번 돈을 세상과 나누는 것, 이것이 바로 부자가 되는 비결인 것이다.

 

우리는 욕망을 만들어 판다 - 에스티 로더

“어머나, 입고 계신 블라우스 정말 아름답군요.” 한 화장품 판매원이 미용실에서 머리를 다듬고 있는 여자에게 말을 건넸다. 그러자 아름다운 옷을 걸친 그 미인은 거만하게 답했다. “어디서 샀든 그것이 아가씨에게 무슨 상관일까? 죽었다 깨어나도 아가씨는 이런 옷을 살 수 없을 텐데…….” 이 말을 들은 판매원은 가슴이 두방망이질하고 얼굴이 화끈거려 도저히 그 자리에 서 있을 수 없었다. 그리고는 자기 자신에게 다짐했다. “어느 누구도 다시는 나에게 이런 소리를 못하게 할 거야!” 마음의 상처를 깊이 간직한 이 여인은 자신의 다짐을 현실로 만들었다. 그녀가 일군 제국의 이름은 바로 세계적인 화장품 회사인 ‘에스티 로더(Estee Lauder)’다.

 

에스티의 기억처럼 그녀의 첫 시작은 푸대접과 초라함뿐이었다. 사업 자금도 없었고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에스티는 고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했다. 결혼 2년 후 낳은 첫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자 이 여인은 어떻게든 돈을 모아 한 달에 한 번은 플로렌스 모리스의 미용실에 가서 금발로 염색을 했다. 예쁘게 꾸미는 것도 꾸미는 것이었지만, 자신이 부엌에서 만든 크림을 선전하기 위해서였다. 나중에는 미용실 고객들의 얼굴에 크림을 발라 주기 위해 그들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대부분의 시간을 여성들의 얼굴에 크림을 발라 주고 상담하는 데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미용실 주인인 모리스 여사가 에스티에게 물어 왔다. “피부가 어떻게 그리 생기 있고 깨끗해요?” 직감적으로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한 에스티는 다음번에 자신의 제품을 몇 가지 가져갈 것을 약속했고, 한 달이 채 지나기 전에 미용실에 나타났다.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화장품 네 통을 가져갔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드디어 위대한 화장품 제국이 건설되는 것이다.

 

에스티는 미용실 한 구석에 작은 판매대 하나를 얻었다. 크림은 준비되어 있었고, 문제는 용기였다. 그녀는 오색빛이 나는 흰 오팔 유리병에 까만 뚜껑이 있는 용기를 잔뜩 샀다. 여기에 자기 이름인 ‘에스티’를 붙였다. 그녀 나이 30세 때의 일이다. 드디어 미시즈 로더가 공식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이때부터 화장품 역사는 에스티 로더와 함께 쓰여지기 시작한다. 에스티는 쉬지 않고 일했다. 그녀의 입을 빌어 표현하자면 “하루라도 세일즈를 하지 않는 날이 없었다.” 머리를 손질하러 온 고객들이 두건을 쓰고 지루하게 앉아 있는 동안, 에스티는 공짜로 크림을 발라 주었고, 그만하라는 말이 나오기 전에 매우 재빨리 화장을 마무리했다. 즉각 반응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쓴 거예요?”라며 놀라운 반응을 보였다. 장사는 승승장구했다. 다른 미용실에서도 제품 시연회를 열자는 제안을 받았다.

 

에스티는 제대로 휴가 한 번 가지 못했다. 참고로 몇 번의 휴가도 쉬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농담 삼아 자신의 휴가를 ‘노동 휴가’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휴가를 즐기러 온 사람들에게 크림을 발라 주며 피부 손질법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업은 날로 번창했지만 남편과의 갈등은 점차 깊어져 결혼 9년 만에 서로 갈라서게 된다. 하지만 이들 부부는 첫째 아들 레너드가 아픈 것을 계기로 재결합하게 된다. 재결합 후 이들 부부는 단순한 부부 관계를 넘어 동업자 관계를 유지했는데, 에스티는 판매를 맡고, 상업학교 출신인 남편 조는 재정과 실무를 담당했다.

 

한편 그녀는 자신의 독특한 마케팅 방식으로 자신의 선배들이자 이미 화장품 업계의 큰 별이 된 헬레나 루빈스타인과 엘리자베스 아덴의 뒤를 이어 자신만의 제국을 건설해 나갔는데, 그녀를 경영 천재로 꼽는 이유는 현대 화장품 마케팅의 패러다임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지금은 일반화된 샘플을 통한 체험 마케팅을 처음으로 도입한 인물이 바로 에스티다. 당시만 해도 무료로 샘플을 나누어 주면 ‘사업을 말아먹는 행위’라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런 통념을 따르지 않았다. 좋은 제품을 쓰면 반드시 다시 구매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밀어붙였고, 그의 결정은 눈부신 성공을 안겼다. 또 백화점에서 여성들 얼굴에 직접 화장품을 발라 주는 마케팅 방식도 에스티로부터 시작됐다. 그리고 판매 채널도 기존 회사들과 다른 길을 선택했다. 경쟁자이자 선배인 헬레나 루빈스타인과 엘리자베스 아덴은 미용실을 중심으로 화장품을 팔았지만, 에스티는 메이크업 경험이 별로 없는 여성들을 타깃으로 잡고 백화점 입점에 사활을 걸었다. 메이크업 서비스를 하고 무료 샘플을 나눠주고, 그 고객들이 입소문으로 다시 에스티 로더의 제품을 구매하게 하는 마케팅 전략을 구사했던 것이다.

 

본 도서요약본은 원본 도서의 주요 내용을 5% 정도로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원본 도서에는 나머지 95%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보다 많은 정보와 내용은 원본 도서를 참조하시기 바라며, 본 도서요약본이 좋은 책을 고르는 길잡이가 될 수 있기 바랍니다.

에스티는 제품 개발을 할 때도 역발상의 사고로 승부를 걸곤 했는데, 대표적인 제품이 ‘젊음의 이슬’이란 뜻의 향수 유스 듀다. 1953년에 태어난 이 향수는 맥박이 뛰는 곳에 조금씩 떨어뜨리며 아껴 써야 한다는 기존의 사고방식과는 전혀 다르다. 온몸에 뿌리고 느끼는 목욕용 향수였던 것이다. 부엌에서 크림을 만들던 가정주부가 평생을 기울여 일군 에스티 로더 그룹은 이제 세계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했는데, 그녀의 이런 성공은 투철한 영업 마인드와 아름다움에 대한 그녀의 독특한 철학의 결과다.

출처: http://successfulman.tistory.com/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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